안타까운 배달기사님이다 VS 배달러의 소설이다
목차
너무 사는게 힘들어서 그냥 제가 살아왔던 얘기나 해볼까 합니다.
하나도 재미없고 우울한 얘기지만 속이 너무도 답답해서 이렇게라도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네요.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저만 버려둔 채 야반도주를 하셨습니다. 혼자가 된 저는 슬플 겨를도 없이 동네 사람들의 모든 원망과 화살을 감당해야 했죠.
어제 까지도 사이좋게 놀았던 친구들은 자신들의 부모님들이 피해를 본 상황이라 당연히 저를 원망하며 광신도들 마냥 괴롭히기 시작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저의 부모님을 믿고 큰돈을 빌려준 피해자이기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죄하라며 발가벗기고 교실마다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었습니다.
( 여자애들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수치심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네요 )
지금 생각해보면 뉴스에 나올만한 아동학대라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전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그 고초를 겪고 다음날 바로 살던 동네를 도망쳐 무조건 걷기 시작 했습니다. 혹여나 아는 사람 마주칠까봐 길을 나두고 산을 타고 다녔죠.
그때 팀스피릿 훈련이라고 미군들이 산에 땅을 많이 파놓아서 밤에는 그곳에 들어가자던게 생각나네요.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를 걷다 잘 먹질 못해 영양실조로 쓰러져 기절 했는데 깨어나 보니 모르는 사람 집이더라고요
그리고 절 구해주신 분이 여긴 충주 엄정면이고 단무지 농장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살던곳이 앙성면이였으니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 동네에서 많이 못 벗어난거죠. ( 차로 1시간 거리 )
그날부터 전 그렇게 단무지 농장에서 숙식을 제공 받으며 종일 단무지를 뽑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저 혼자고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전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사람이었죠.
저를 구해주신 분은 여기 단무지 농장 주인인데 처음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반년정도 있어보니 악덕주인인걸 깨달게 되었죠.
반년동안 단 한푼도 돈을 받질 못했습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돈 좀 달라고 하면 너 살려줄 때 링겔 맞혀주고 옷 사 입힌 거 기억 안나냐며, 부지갱이로 다짜고짜 마구 때리는데 정말 참.. 그 당시에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얼굴을 맞아 앞니가 부러지기 까지 했으니 13살인 제가 어떻게 감당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반년 만에 단무지 농장에서 도망을 치게 되었죠. 그리고 간곳이 충주 시내 현대 타운이라는 큰 건물 ( 예전에 엄마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돈까스 먹었던 추억이 생각나서 왔나 봅니다)
그렇게 그 앞에서 주린배 움켜잡고 있다가 주변에 짜장면 먹은 그릇 내놓은거 보고는 배가 고파 손으로 긁어서 먹고 있는데 그릇을 찾으러 온 아저씨가 절 보고는 갈 곳이 없냐 하더니 뒤에 타라고 해서 그대로 중국집에 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이 배달일이 저의 평생직장이 될 줄은 몰랐었죠.
그곳에서 3년을 넘게 일했는데 역시나 부모도 없고 거지인 저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줄리가 만무하죠. 그릇 깨먹었다 제외하고 늦게 일어났다 제외하고 배달 늦었다고 제외하고 일을 매일 하지만 오히려 어거지 빚만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도망. 이때 막 17살이었는데 충주 터미널에서 다짜고짜 직행버스를 타고 간곳은 수원이었습니다. 어렷을때 수원에 부모님과 놀러 왔던게 기억이 나서 아마도 수원행을 택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수원에 와서 바로 당일에 권선동에 수원성(중국집 이름)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한달 월급 30만원을 준다고 하길래 너무 큰돈이라 역시 도시 사람은 사기를 쳐도 너무 후려 치는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 달 일하고 나니 진짜로 30만원을 지급해서 너무 놀랐네요.
수원성에서 2년을 일하고 권선동에 있는 동서빌라 지하방을 얻게 되면서 처음으로 제 거주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도움으로 민증도 만들고 원동기 면허증도 따게 됐죠. 이렇게 사람으로서 자리가 잡혀갈 쯤에 믿기지도 않게 수원 길거리에서 아빠를 마주치게 됩니다. 너무 커버린 절 알아보지 못하는 아빠를 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근대 사실 제가 목 놓아 울었던건 아빠의 너무도 볼품없는 행색 때문이였죠. 제 기억의 아빠는 양복을 입고 깔끔하고 단정한 멋쟁이 머리를 하고 계셨는데 지금 앞에 계신 분은 영락없는 늙은 노숙자였습니다.
아빠랑 서로 부둥켜안고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아니다 이렇게라도 만나서 너무 감사하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티격태격하며 1년을 함께 살면서 나름 행복했는데..
또다시 이유도 모른 채 아빠에게 배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0살이 되던 해 아빠는 제 배달로 모은 전 재산 350만원 그리고 제 명의로 몰래 만든 카드빚 500만원까지 지게 하시고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셨죠. 그때 제가 맹장이 터져서 수원 중앙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보험으로 지급된 병원비까지 남김없이 가져가 버리신 겁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상황. 진짜 삶의 의욕도 없어 이대로 병원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왠지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하기도 한거 같아서 그냥 이 악물고 울면서 대걸레를 들고 병원 바닥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원장이 나와 뭐하는거냐고 하길래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겠다고 하니 인상을 쓰고 발길질을 하며 그냥 가라고 하더군요. 비참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너무도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를 추스리게 도와준 분은 수원성 사장님이셨죠. 그분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고 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3년 정도가 지나고 어느 날 누가 제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습니다.
아빠였죠. 머리는 찢어지고 온몸은 흙투성이 빚쟁이들에게 맞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갈 곳이 없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한눈에 봐도 쇠약해져 있는 아빠를 보고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식도암까지 걸리신 아빠. 진짜 나 혼자 사는 것도 지옥 같은데 아빠가지 건사해야 하니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아빠 병수발을 1년 정도 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수백 번, 수천 번 악마가 속삭입니다. 아빠 자격도 없는 사람 너도 똑같이 버려라. 네.. 전 결국 버티지 못하고 아빠를 버렸습니다. 새벽에 혼자 몰래 빠져나와 서울행 기차를 타며 엄청 울었죠. 결국 아빠나 저나 똑같이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일뿐입니다.
서울 쌍문동에서 서울 수서 그리고 성남 태평3동까지 이사를 다니며 영혼 없이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3년 전 배달대행 일을 하다 혼자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 복합골절(정강이 뼈가 으스러져 살을 뚫고 나왔네요)가진 재산이라고는 원룸 보증금 500, 통잔잔고 100 다리가 시원치 못하고 절뚝거리니 이젠 배달일도 취직이 안됩니다.
제가 사장이라도 저 같은 사람 안 쓰고 말겠죠. 지난 42년간 살면서 저에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면, 부모님이 저를 버리기 전인 국민학교 시절이 제일 행복했네요. 그때 말고는 지금껏 한번 제대로 웃어본 적도 기뻐해 본적도 없는 거 같습니다.
요즘 방구석에 누워서 드는 생각은 어떻게 죽을지 고민중입니다. 앞으로 더 살아봤자 고통만 기다릴텐데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엄마가 너무 보고 싶네요. 죽기 전에 엄마 한번만 봤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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